충주 중산고 교장

 

[ 충청매일 ] 달천강가의 버드나무에 연두색 이파리가 나기 시작할 무렵의 봄빛이 참 좋다. 겨우내 빈 가지로 쓸쓸히 서 있다가 이제 막 깨어나는 산과 들을 바라보면, 삶에의 의욕이 불끈 솟아나는 듯해서 좋다.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면 살짝살짝 연두색 생명이 출렁거리는 듯한 모습에 설레지 않은 이가 없다. 고개 들면 저 멀리 산 듬성 듬성, 진달래꽃이며, 매화며, 산수유꽃이 피기 시작한다. 봄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을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로 시작해,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로 끝나는 이성부 시인의 시 ‘봄’의 구절들이 저절로 입밖으로 나온다. 멀리 남쪽부터 꽃소식을 달고 온 봄은 그야말로 감격이다. 꽁꽁 언 대지에 새생명이 움트듯, 메말랐던 가슴에 아지랑이 피듯, 살아야겠다는 희망이 용솟음친다. 

 흐드러지게 벚꽃이 피고 지면, 복숭아꽃, 사과꽃이 연이어 만발하는 봄날은 찬란하다. 하지만 인생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매일매일이 따뜻한 봄날일 수는 없다. 오히려 화사한 꽃이 흩날리는 봄날이기에 더욱 슬프고 외로운 가슴도 있다. 사랑을 잃고 한없이 외롭고 쓸쓸한 이도 있고, 가난이나 병마와 싸우며 하루하루 고통에 잠겨있는 이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휘감고 있는 고통과 우울 때문에 꽃피는 봄이 더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다. 황사먼지가 자욱하기도 하고, 예고도 없이 꽃샘추위가 오거나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날도 있다. 화사하고 따뜻해서 오히려 더 외롭고 초라하고 빈곤하다. 이런 흐린 봄날에 시를 읽는다. ‘세기말을 지나 휘황한 봄날이다/ 귀를 틀어막은 청소부가 실패한 비유들을 쓸어 담고 있는데/ 꽃가루들은 사방에서 속수무책으로 흩날린다/ 눈물을 획책하고 있는 저 미세한 말씀들, 지금은/ 알레르기가 종교를 능가하는 시대라서/ 파멸과 구원이 참으로 용이해졌다(심보선의 시 ‘종교에 관하여’ 중에서)’를 읽는다.

 ‘꽃그늘 분홍 물소리에 함께 발 빠뜨리고/ 추녀 끝 그렁그렁 밤풍경 뱃놀이에 봄빛 여위는 줄 몰라/ 그러고 보면, 저무는 사월도 이리 우거진 봄빛도/ 왼갓 날것들이 물어다 놓은 저 밤하늘/ 저 무한무한 반짝이는 뻥 뚫린 무한고도의 우중명월(雨中明月) 아닐까 몰라(김명리의 시 ‘냇물’ 중에서)’ 나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이 저주받은 삼천리에 피었다 지는/ 모오든 꽃들아/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양성우의 시 ‘지금은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중에서)’와 같은 시들을 읽으며 존재하는 것들의 휘황한 아름다움과 내면에 아로새겨진 슬픔,기쁨에 공감하며, 깊이 침잠해가는 봄날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본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를 읽고 비탄에 잠기다가도,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김수영의 시 ‘풀’ 중에서)’를 읽으며 힘을 내보기도 한다. 

  흐린 봄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못살 것 같기도 하고 떠나 버린 옛사랑이 한없이 그리울 때면 바람 부는 언덕에서 서서 시를 읽는다. 시를 읽다보면 가슴 속 울렁이는 물결도 잦아들고, 또 한 시절 힘내서 단단하게 살아가기 마련이다. 마음이 어지러운 흐린 봄날이면, 시를 읽자.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김남주의 시 ‘사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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